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남송멸망과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 === 1274년 11월 27일, [[충렬왕]]에게 원정군의 퇴각에 관한 보고가 올라갔으며, 4일 후 생존한 여몽연합군의 배들이 속속 고려로 귀환했다. 몽골군 장군 [[훈둔]], [[홍다구]], 유복정은 1개월 후 개경에 올라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앞에 일본에서 포로로 잡아온 남녀 어린이 200명을 헌상하고 자초지종을 보고한다. 몽골군이 실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고, 퇴각의 책임 또한 패전과는 거리가 먼데다 전과는 초라했기 때문에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이 다시금 원정을 재추진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275년 1월, [[베이징|대도]]에 도착한 사령관 훈둔은 과연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한 사정은 숨기고 일본을 패퇴시킨 전적만 부풀려 보고하며 태풍에 입은 피해는 고려가 만든 배가 튼튼하지 않았던 탓으로 책임을 돌렸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충렬왕의 예상대로 1차 원정을 전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2차 원정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보내 고려는 열매는 고사하고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니 일본 원정을 재고해달라고 하소연을 했으나 쿠빌라이는 고려의 사정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재원정에 앞서 일본이 충분히 쫄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재차 제국에 굴복하고 입조할 것을 권하는 사신단을 보낸다. 일본 사서 간토평정전(關東評定傳)에 따르면 1275년 4월 15일, 중수대부 예부시랑(외무차관급) 두세충과 봉훈대부 병부낭중(국방차관급) 하문저 등이 이끄는 30여명의 원나라 사신단이 쿠빌라이의 국서를 가지고 [[다자이후]]에 도착했다. 사신단의 수장 일본선론정사(日本宣論正使) 두세충은 몽골인, 부사 하문저는 한족이었다. 또한 [[위구르]]와 [[아라비아]]계 색목인 관료 2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본에 가기 전 고려에 들러 서찬이라는 이름의 고려역어랑장(고려군 통역장교) 한 명을 추가했다고 한다. [[싯켄]] [[호죠 토키무네]]는 아직 원나라와 교전상태라는 인식 하에 4개월 동안 이들을 다자이후에 쳐박아 두고 내부적으로 대응 방안을 논의했고, 이후 8월, 마침내 원 사신 5인을 가마쿠라로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9월 7일, 사전 경고도 없이 [[에노시마]]에 마련된 공개처형장으로 끌고 가 수많은 일본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을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3_0208_0010_0150|모두 참수하고 효수해버렸다.]]'''[* 이 때 동행한 통역관 서찬도 함께 처형당하는 운명을 맞이 했는데, 서찬을 포함해 사신단을 이끌던 5인의 신상과 그들이 최후에 남긴 시문이 일본 사서 '가마쿠라 연대기'에 전해지고 있다.] 국난을 맞아 [[다이묘]] 및 [[사무라이]]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위를 선양한다는 명분이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hubillay&logNo=220869780443|관련글]] 그리고 1276년 3월, 가마쿠라 막부는 거기에 더해 '''연합군의 원정에 대한 응징으로 반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서일본 지역 다이묘들에게 전함 건조와 병력, 자원 및 비용을 징발할 것을 명령하고, 이 부담을 부과하고 징수할 책임을 [[키타큐슈]][* 현존하는 북부 규슈 지역 최대도시다. 일본 내에서 야쿠자의 활보로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하다.]의 가장 강대한 다이묘인 쇼니 가게스케에게 맡겼다. 이를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이라 했다. 원정군의 본영은 하카타에 설치되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역시 쇼니 가게스케가 임명되었다.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를 중심으로 조달하되 부족하면 [[시코쿠]]와 [[주고쿠]]에서도 보충하고 1280년까지 준비해 고려로 출격하기로 했다. 이러한 [[임진왜란]] 프리퀄 삘의 계획은 거창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원 사신단 참수와 같이 내부결속 및 막부의 권위 세우기의 일환이었을 뿐이었다.[* 이국인 고려 측의 상황이 막부 측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데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해외로 출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려가 평화를 찾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고려군이 원에 복속된 형태이기는 해도 그럭저럭 재건된데다, 원나라군도 다수가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원정이 끝난 뒤에는 원나라가 고려군을 철저하게 약체화시키면서 13세기 말 카다안. 그리고 14세기 내내 이어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던 그 약체 고려군이 나오게 되지만, 이 시기에는 일본 원정에 끌고 가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해체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장테크 타던 시절에도 침략 수개월 뒤 20만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동원력은 건재했기 때문에 막부가 고려로 쳐들어가면 원래 자기들이 생각했던 혼슈에서의 원나라 군대와의 대결을 고려군 상대로 반대 입장에서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그때 고려 수군은 그야말로 넘사벽이어서 침공해봐야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함대에 당한 대굴욕을 미리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국출격과 함께 계획된 하카타 만을 방비하기 위한 대규모 방벽 건설 및 석루 축조는 예정대로 실행되었다. 어쨌든 두세충 사신단의 운명은 4년 후인 1279년까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동안 쿠빌라이 칸은 [[푸젠성]] 및 [[광동성]] 일대가 전장인 남송 원정에 골몰한 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 칸|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일본 원정에 대한 결단을 미뤄야 했고 고려에게도 무기 제조와 군선 건조를 잠시 중단하도록 한다. 이후 1276년이 되어서야 명장 [[바린 바얀|바얀]]이 지휘하는 원나라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리고 광동 방면으로 밀고 내려가며 원군은 [[하이난 섬]]까지 내려와 남송 잔당과 전투를 계속하고 난링산맥 인근 군현을 하나둘씩 먹어갔다. 남송 출신 항장으로서 쿠빌라이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던 장군 [[범문호]]는[* 당시 원나라에 부족했던 수군 장군이어서 대규모의 수군 전단을 끌고오자 쿠빌라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후금 역시 [[모문룡]]이 이끄는 가도 패거리의 항복 후 명나라 항장들이 대규모 수군과 함께 [[조총]], [[불랑기포]], [[홍이포]] 등 화약무기까지 가져오자 천군만마를 얻었고 조선을 [[병자호란]]에서 패퇴시켰다.] [[임안]] 함락 후 [[김방경]] 등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 관리들도 참석한 일본에 대한 2차 원정 실행여부를 논하는 회의에서 일본 토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명재상 [[야율초재]]의 손자 야율희량이 그동안의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할 때라며 반대하자 쿠빌라이는 야율희량의 손을 들어주었고 아직 남송의 잔당이 남아있다는 이유도 들어 일본 원정에 대한 결론을 계속 연기하기로 했다. 김방경은 이를 [[충렬왕]]에게 보고했고 고려는 일시적으로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홍다구는 계속 고려에 남아 패악질을 일삼다가 그 끝에 가서는 [[김방경]]에 이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까지 연루된 무고 사건을 일으켰고 이에 쿠빌라이는 충렬왕을 원의 수도인 [[베이징|대도]]로 소환해 사실관계를 따진 후 충렬왕에게 부마국고려국왕(駙馬國高麗國王)이라는 금인를 주어 공식적으로 [[부마]]국으로 지정함으로써 고려를 완전히 속국화시킨다. 그리고 1279년 3월에 현 [[광동성]] 남부 [[광저우]] 앞바다에서 벌어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완벽하게 멸망하고 중국 대륙을 몽골족이 통일하며 [[중원]]이 온전히 원나라의 것이 되자 쿠빌라이 칸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일본 원정을 재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먼저 쿠빌라이는 남송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들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범문호 등에게 남송 출신 [[한족]] 항장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신단을 꾸리게 했고 범문호는 자신의 가신인 주복과 연충을 정사, 부사로 하고, 남송에 유학 와 있던 [[일본인]] 승려를 안내 및 통역관으로 포함시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같은 해 6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자이후에 도착한 후 가마쿠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장 포박되었고,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의 해변까지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후 고려사에 따르면 두 달 후인 8월, 생존한 두세충 사신단의 선원들 중 4인이 기적적으로 고려로 탈출해와 자초지종을 알렸으며, 고려 조정은 이듬해인 1280년 2월, 원나라에 이 소식을 보고한다.[* [[https://m.blog.naver.com/byunsdd8972/220651819733|뱃사공 상좌(上左)와 바닷길 안내자[引海] 일충(一冲) 등 네 명이 일본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와,“지원(至元) 12년(1275) 황제가 사신을 일본에 보낼 때 우리나라에서는 통역관으로 낭장(郞將) 서찬(徐贊) 및 사공 서른 명을 함께 보냈는데 사신과 서찬 등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왕이 낭장 지선(池瑄)을 시켜 상좌 등을 원나라로 압송해 그대로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보낸 사신단이 죄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극대노한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 의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조부 [[칭기즈 칸]]이 [[호라즘 왕국]]과 [[서하]]를 칠 당시 상황과 똑같은 경우였다. 남송의 강서 4성에 600척의 군선 징발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담당하게 된 남송의 항장들은 빡친 쿠빌라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가 요구한 것의 5배가 넘는 3500여 척의 배를 건조해 주었다. 이후 1280년 8월, 쿠빌라이 칸은 요양([[랴오양시]])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동원수(征東元帥) 훈둔, 홍다구, 범문호를 지휘관으로 대군을 모아 2차 일본 침공을 명령한다. 이에 고려에도 또 징발령이 떨어지자 충렬왕은 다시금 김방경을 통해 어려운 형편을 설명하며 병력 동원과 군량 비축은 무리라고 필사적으로 호소했으나, 이미 일본을 족치기로 결정한 터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